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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물 (수질 차이, 미네랄 영향, 블라인드 테스트)

by 집콕바리스타 2026. 4. 20.

커피의 98%는 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물에 신경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저도 오늘까지는 그냥 넘어갔을 겁니다. 오전에 집에서 내린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한 잔, 오후에 카페에서 마신 같은 원두 한 잔. 같은 원두인데 맛이 달랐습니다. 그 차이가 물에서 비롯됐다는 걸 몸으로 느낀 하루였습니다.

커피에 쓸 물을 고르고있는 여자

같은 원두인데 왜 맛이 달랐을까 — 수질 차이가 만드는 커피 맛

오전에 브리타 필터로 걸러낸 물로 예가체프를 내렸을 때는 꽃향기가 올라오면서 깔끔한 산미가 입안에 퍼졌습니다. 익숙하고 만족스러운 한 잔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주 시내 단골 카페 보롬왓커피에서 같은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시자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단맛이 더 도드라지고 향이 한 층 깊었습니다.

신기해서 잠깐 쉬고있던 바리스타 지훈 씨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돌아온 답은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제주 삼다수는 현무암층을 통해 자연 정제된 물로, 미네랄 함량이 낮은 연수(軟水)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연수란 칼슘이나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 이온 농도가 낮은 물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경도(硬度) 60mg/L 이하를 연수로 분류합니다. 미네랄 이온 농도가 낮으면 커피 속 향미 화합물과 불필요하게 결합하지 않아, 원두 본연의 맛이 더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반면 오후에 저는 편의점에서 에비앙을 사서 집에서 같은 원두로 한 번 더 내려봤습니다. 에비앙은 경수(硬水)에 해당하는 생수입니다. 경수란 칼슘과 마그네슘 이온이 많이 녹아 있는 물로, 에비앙의 경도는 약 291mg/L에 달합니다(출처: 에비앙 공식 홈페이지). 직접 마셔보니 맛이 묵직하고 둔탁해지면서 오전에 느꼈던 산미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같은 원두로 같은 방식으로 내렸는데,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핵심 포인트:

  • 연수(경도 60mg/L 이하): 미네랄 이온이 적어 향미 화합물 손실이 적고 산미·향이 선명하게 살아남
  • 경수(경도 120mg/L 이상): 칼슘·마그네슘 이온이 커피 향미 화합물과 결합해 추출을 방해하고 맛을 무겁게 만듦
  • 중간 경도(60~120mg/L): 밸런스형. 스페셜티 카페에서 가장 많이 권장하는 범위

물이 커피 맛에 영향을 주는 원리 — 미네랄 영향과 추출 메커니즘

사실 이건 그냥 '기분 탓'이 아닙니다. 커피 추출(extraction)이라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유가 명확해집니다. 추출이란 분쇄된 원두 안에 있는 수용성 성분들을 물이 끌어내는 과정입니다. 이때 물속에 녹아 있는 미네랄 이온의 종류와 양이 어떤 성분을 얼마나 끌어낼지를 결정합니다.

스페셜티 커피 업계에서는 이를 수치로 관리합니다. TDS(Total Dissolved Solids)라는 지표가 바로 그것입니다. TDS란 물에 녹아 있는 총 용존 고형물의 양을 나타내는 수치로, 커피를 추출하기 전 물의 TDS는 75~150ppm 사이를 이상적인 범위로 봅니다. 이 수치가 너무 낮으면 향미 성분이 충분히 추출되지 않고, 너무 높으면 쓴맛이나 잡미가 부각됩니다. 제가 다니는 보롬왓커피 같은 스페셜티 카페들이 TDS 측정기로 물을 관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폼 잡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후로는 납득이 됩니다.

미국 스페셜티 커피 협회(SCA)는 브루잉 워터 스탠다드를 통해 이상적인 커피용 물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총 경도 17~85mg/L, TDS 75~250ppm을 권장 범위로 규정합니다(출처: SCA). 이 기준에서 보면 에비앙(경도 291mg/L)은 이미 권장 범위를 크게 벗어난 셈입니다. 제가 직접 마셔보고 느낀 맛의 차이가 단순한 주관적 감상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물이든 깨끗하면 다 같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제 경험상 이건 분명히 다릅니다. 깨끗함과 커피 추출에 적합한 수질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어떻게 할까 — 블라인드 테스트로 찾은 기준

카페에 다녀온 오후, 저는 에비앙 테스트를 끝내고 나서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다음번엔 제주 삼다수, 백두산 하늘수, 수돗물, 브리타 필터수를 놓고 직접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이 가장 좋다는 정답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제 입에 맞는 기준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란 어떤 물인지 정보를 가린 채 맛만으로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정보가 차단되면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혀의 감각만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동생과 수돗물 vs 생수를 블라인드로 마셔봤을 때, 동생이 아무 설명 없이 "이게 더 깨끗한 느낌"이라고 맞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물의 차이가 기분 탓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현재 집에서는 브리타 필터수를 기본으로 쓰고 있습니다. 브리타 필터는 활성탄(activated carbon)과 이온 교환 수지를 이용해 수돗물의 염소 냄새와 일부 미네랄을 제거합니다. 이온 교환 수지란 물속의 특정 이온을 다른 이온으로 치환하는 소재로, 경도를 낮추는 데 효과적입니다. 수돗물을 그대로 끓여 쓰던 시절과 비교하면, 브리타 필터수로 바꾼 뒤 커피의 향이 더 또렷해졌습니다. 만약 내가 경험이 없다면 브리타 필터수를 써보시는걸 추천합니다. 물론 완벽한 정답이라기보다는, 지금 제 환경에서 가장 일관된 결과를 내주는 선택에 가깝습니다.

여러 가지를 바꿔보면서 느낀 것은 하나입니다. 물의 종류 자체도 중요하지만, 같은 물을 꾸준히 쓰는 일관성이 더 중요합니다. 물이 계속 바뀌면 같은 원두를 써도 결과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하루는 커피를 세 잔 마셨지만 머릿속엔 물 생각만 가득한 이상한 날이 됐습니다. 원두와 추출 방식에만 집착하던 저에게, 물이 커피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라는 걸 처음 제대로 깨달은 날이기도 합니다. 다음번에 커피 맛이 왜인지 달라졌다면, 원두보다 먼저 물을 의심해 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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